
실제로 원전을 모두 폐쇄했던 최초의 유럽국가, 이탈리아가 45년 만에 결국 무릎을 꿇었습니다. 치솟는 전기요금과 에너지 위기 앞에 '원전 재가동'이라는 파격적인 카드를 꺼내 든 것입니다.
질베르토 피케토 프라틴 이탈리아 에너지부 장관은 지난 14일(현지시간) 폴리티코 유럽판과의 인터뷰에서 “2035년까지 원자력 전력 생산을 재개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관련 법안이 상원 통과를 앞둔 가운데, 이탈리아는 수십 년간 이어온 탈원전 정책에서 벗어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새 원자로 건설을 위한 입법안은 이미 지난 6월 하원 문턱을 넘은 데 이어 상원의 최종 표결만을 남겨둔 상태입니다. 해당 법안이 통과되면 정부는 올 연말까지 사업 추진에 필요한 세부 시행령 재정 절차를 마무리할 계획입니다.
프라틴 장관은 “우크라이나와 페르시아만을 둘러싼 공급망 충격으로 이탈리아의 해외 에너지에 대한 과도한 의존 문제가 드러났다”며 “원전 도입은 국가안보의 문제”라고 강조했습니다.
이탈리아는 1986년 체르노빌 참사 직후 실시된 국민투표 결과를 반영해 탈원전 행보를 본격화했으며, 1990년 내에 가동 중이던 모든 원자로를 셧다운했습니다. 이후 국가 전력 수요의 상당 부분을 해외 수입에 의존해 왔으나, 최근 글로벌 정세의 급변으로 수급 리스크가 가중되면서 독자적인 에너지 인프라 확보가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습니다.
이탈리아가 정책을 선회한 배경에는 안보와 경제적 유인이 존재합니다. 우크라이나 사태와 중동 정세 불안으로 해외 에너지 의존의 위험성이 드러났고, 유독 높은 전력 가격이 산업 경쟁력을 약화시켰기 때문인데요. 프라틴 장관은 이념보다 실용성을 중시하는 젊은 세대의 인식 변화도 원전 복귀를 뒷받침하는 주요 동력으로 꼽았습니다.
앞으로 전력 수요가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점도 원전 복귀를 추진하는 이유입니다. 전기차 보급이 확대되고 산업 현장에서 화석연료 대신 전기를 사용하는 비중이 늘어난 데다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까지 증가하면서 10~15년간 전력 수요가 급증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이탈리아의 전략은 대형 원전이 아닌 차세대 소형모듈원자로, 즉 SMR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달 중 통과될 법안은 독립적인 원자력 안전기구를 신설하고 방사성 폐기물 관리 기준을 마련하는 등 법적 기반을 구축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정부는 2020년대 말 SMR 양산 체계가 갖춰지면 건설 기간을 3~4년으로 단축해 2034년에서 2035년 사이에 본격적인 전력 생산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합니다.
다만 이번 법안이 통과되더라도 원전 건설이 즉시 허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독립적인 원자력 안전 규제기관을 설립하고 방사성폐기물 관리 규정을 마련하는 등 신규 원전 도입을 위한 법적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정부는 사업 비용과 운영 주체, 후보 용지 등도 검토할 계획입니다.
실제로 이탈리아의 전력 가격은 인근 스페인보다 약 40% 이상 비쌉니다. 스페인은 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은 동시에 기존 원전을 지속 운용하며 전력 단가를 낮게 유지해 왔습니다.
다만 스페인 정부는 2035년까지 가동중인 원자로를 순차적으로 완전 폐쇄하겠다는 탈원전 방침을 고수하고 있어, 향후 두 국가의 에너지 정책 방향은 명확히 대조를 이룰 것으로 보입니다.
이탈리아가 에너지 안보와 가격 안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성공적인 복귀를 이뤄낼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김나윤 머니투데이방송 MTN 인턴기자